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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Cheers.  l

시메트라X루시우

제모각사

 

이런 곳 분명 어디서 많이 봤었다. 영화나 TV에서 꿈속을 묘사할 때 대충 이런 분위기의 공간감을 조성했었다. 밝은 회색으로 마무리된 내장재들과 흰색 드레스코드에 맞게 입은 사람들, 넓디넓어서 루시우가 스케이트를 타고 속주로 달려도 아쉽지 않을 법한 넓이의 홀 곳곳에는 추상적인 조각, 전시품들이 놓여있었고 샴페인 잔을 손에 든 사람들이 조형물을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다. 이게 무슨 파티야, 샴페인 마시며 미술관 온 거지--라고 생각한 루시우는 입장확인을 받고 비슈카르가 개최한 연말 파티에 발을 들였다.


인기 있다고 말하기엔 그 표현력이 부족한 루시우가 메가 기업인 비슈카르의 연말 파티에 초대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걸 루시우가 수락한 것은 많은 기자와 연예계 관련자들, 그의 팬들, 그리고 리우 사람들이 놀라기에 충분한 처사였다. 공식 데뷔 후에 전 세계를 돌며 월드투어를 끝낸 루시우는 고향인 리우로 돌아와 폭발사고와 새로 건축된 비슈카르의 시티 센터로 뒤숭숭해지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기로 하고 적들의 본진에 몸을 들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니까. 루시우가 명성을 얻기 전까진 비슈카르에게 있어서 그는 흔한 반비슈카르의 행동대장이었을 뿐이었지만, 비슈카르는 그의 데뷔 앨범과 월드투어를 평화와 공존으로 내세우며 대중들을 사로잡은 그를 더는 똑같은 골칫덩이로 취급할 수 없었다. 루시우는 이 점을 생각해서 겁 없이, 그리고 당당하게 비슈카르의 소굴로 들어간 것이다.


"아아, 루시우. 반가워요. 나는 산제이라고해요. 루시우가 온다기에 파티 분위기와 곡 선정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르실 거예요."


그에게 다가온 수많은 비즈니스맨들 처럼, 산제이라는 남성은 비즈니스적인 웃음에 비즈니스적인 말투에, 비즈니스적인 차림을 하고 카드 거울인지 뭔지 모를 비슈카르 특유의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저는 사측에서 먼저 제안한 초대에 응했을 뿐입니다."


명함을 받아든 루시우가 날 선 대답으로 웃어 보였다. 언뜻 보면 루시우가 매너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지만, 루시우가 리우를 뜨자마자 벌여왔던 행동들 때문에 정부 사찰도 받은 비슈카르는 루시우의 욕받이를 한껏 감당할 사람으로 산제이를 선택했다.


"하하, 입담은 여전하시군요 산토스군. 자, 이쪽으로 오시죠. 저희가 준비한 콜렉션을..."


산제이는 루시우에게 조경물들을 보여주며 시답잖은 얘기를 시작으로 타협점을 찾으려 했지만, 홀로그램 너머로 오는 호출에 난감해하며 스탭을 불러다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해결해보려 했다가 뜻대로 잘 안 되자, 산제이는 루시우에게 미안하다며 인사를 하곤 이내 사라졌다.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 이 넓고 지루한 파티에 어쩌다가 혼자 남겨져 붕 떠버린 루시우는 지나가는 웨이터가 들고 있던 샴페인 한 잔을 들고 한 모금 입에 담았다. 씁쓸하면서 달고 감칠 맛 나는 소다수를 입안에 조금씩 굴리면서 바로 앞에 있는 조각물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요리조리 살펴보다 바닥에 쓰여 있는 시중가를 확인하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기 시작했는데 주머니 어느 곳을 뒤져도 미리 챙겨놨다 생각했던 손수건은 온데간데없었다. 빌어먹을 파티 홀은 또 더럽게 넓어서 냅킨이 비치된 곳은 멀리 있었다.


"케헥! 콜록, 콜록..."


한참을 쿨럭거리며 눈물까지 쏙 빼버린 루시우에게 누군가가 하얀색 손수건을 건네줬다. 가녀리고 곱게 뻗은 팔 선을 보아하니 여성이었다. 숨을 고르는 루시우가 한 손으로는 손수건을 건네받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고맙다는 표시를 하며 얼굴에 묻은 것들을 닦아내곤 고개를 들어 호의를 베푼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까맣고 긴 머리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호우, 고마워요. 하필 이런 자리에 손수건을 두고 왔네요."


루시우는 멋쩍게 웃으며 고마움의 표현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앞에 있는 조형물의 가격표를 가리켰다.


"조경물 자체는 멋지지만, 이 가격에 깜짝 놀랬다구요. 워낙에 이런 하이엔드 예술품과는 먼 삶을 살았으니까요."
"그렇죠. 이 조경물의 가격이면 파벨라의 많은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제 말이요!"


루시우는 기뻐하며 펄쩍 뛰었다. 적당히 조용한 소음만 울리던 파티 홀에 열정적인 리우의 아들이 내지른 단말마 같은 반응으로 그 데시벨을 뛰어넘는 소리가 퍼지자 주변 사람들이 조금은 놀란 기색으로 루시우를 쳐다봤지만, 루시우도 그와 함께 있는 여성도 그 시선에 눈치를 보지 않았다. 별일 아닌 걸 확인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전시되어있는 조경물들이 누구의 제자의 것이니, 소재가 무엇이니 등의 얘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연말 파티가 이런 분위기라니, 비슈카르 사람들은 리우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게 분명해요."
"인도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의 파티를 열었다가 흥이 많았던 현지인들이 아쉬워하며 일찍 돌아가곤 했습니다. 이런 음악에는 춤도 못 추니까요."
"오, 이분 뭘 제대로 아시네. 파티에 춤이 빠지면 무슨 소용이에요?"


루시우는 싱글 생글 웃으며 자기와 맞장구쳐주는 비슈카르 소속인 것 같은 여성과 신나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반강제적으로 리우에 발령되어 사원으로서 파티 참석이 필수인 그런 평범한 사측 직원이 아닐까 라고 루시우는 생각했다.


"아차, 소개가 늦었군요 레이디. 아시겠지만, 루시우 코헤이아 도스 산토스라고 해요. 손수건 고마워요. 이건 세탁해서 말씀해주시면 자택으로 돌려드릴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집에 똑같은 손수건이 많이 있어서요."


루시우는 곱게 접어 건넸던 손수건을 다시 거두며 자켓 안주머니에 넣었다. 보통 이렇게 한쪽이 통성명하면 상대도 통성명을 해주는 편인데, 여성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루시우가 하는 말에 대꾸만 하고 있었다.


"그럼 아쉽게도 오늘 이후로 다시 뵙기는 힘들 것 같은데, 이런 따분한 파티에서 말이 통한 분과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서 말이죠."
"사티아 바스와니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사티아. 이런 파티에서 의미 없이 자정까지 기다리는 환영받지 못하는 우리 같은 참석자를 위해 짠 한번 할까요?"
"...좋죠."


어느새 웨이터에게서 샴페인을 두 잔을 챙긴 루시우가 한 잔을 사티아에게 건넸다. 샴페인 잔을 받아든 사티아는 아주 미세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뻗었고, 유리잔이 부딪치는 맑고 청량한 소리가 둘 사이를 지나갔다. 그리고 서로 한 모금씩 탄산을 들이키며 마주 보던 눈 맞춤을 끝내곤 고개를 돌려 둘 앞에 있던 조경물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루시우는 기분이 좋아졌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산제이를 다시 만나서 네고를 시작하면 충분히 그를 설득하고 리우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슈카르 소속임에도 말이 정말 잘 통하는 사티아같은 사람과 연말을 장식했으니, 이젠 리우 사람들을 위해 새해를 잘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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