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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달 아래 그림자는 말이 없다  l

리퍼X메르시

군인들은 여전히 재미가 없었다. 술을 마실 줄은 알아도 취할 줄은 몰랐고 옷을 갖춰 입는 법은 알아도 맞춰 입는 법은 몰랐다. 파란색 제복이 그나마 화사해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것만으로도 다들 즐거운 눈치였다. 하루 빌린 펍은 기분 좋게 소란스러웠다. 치글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딱한 자세로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다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반가운 이름들을 불렀다. 가장 시끄러운 사람은 역시나 라인하르트였다. 포효하듯 이름을 불러대고 가슴을 부딪쳐 인사했다. 모두들 그의 근처에서 북적거렸다. 라인하르트는 머리 위로 자랑해 마지않던 독일산 맥주를 들고 건배사를 짧게 외쳤다.

누군가 치글러의 허리를 끌어안았을 때 치글러는 놀라지 않았다. 제시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었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비록 몇 년 만이었지만 치글러는 그때의 익숙함을 놓지 못한 채였다. 치글러는 배 위에 놓인 제시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제시는 오랜 연인처럼 치글러의 볼에 입을 맞추며 오랜만인 인사를 남겼다. “어머, 당신은 블랙워치 아니었나?” “그래도 오버워치의 마스코드였지.” 제시는 여전히 서글서글했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 언젠가 제시에게 미인계를 써보는 건 어떠냐고 말했다가 호되게 혼난 기억이 났다. 치글러는 그 때 이야기를 했고 제시는 호탕하게 웃었다.

몇 년 만에 만난 동갑내기 사이에는 그동안 쌓아놓은 말들이 멈출 생각을 않았다. 해체하기 직전의 상황들과 소문들, 당시 오버워치와 블랙워치의 상반된 상황과 여론들, 그때의 심각했던 상황들은 수다거리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제시는 액션 영화를 보는 어린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치즈를 씹다가 높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어찌나 집중하는지 레나가 옆에 앉아서 밝은 목소리로 인사할 때 제시는 놀라서 한참 동안 비명을 질러댔다. 소란스럽던 펍이 조용해졌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겨우 진정한 제시는 괜히 멋있는 표정을 지어대며 아무런 일도 없는 척을 했고 레나는 오랫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사령관님들은 다들 어떻게 되셨어? 레나의 명랑한 질문에 제시의 표정은 냉랭해졌다. 제시는 씹던 치즈를 내려놓고 담배를 꺼냈다. 치글러의 눈치에 다시 내려놓긴 했지만 언짢은 표정은 그대로였다. “두 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은 아직도 행방불명이에요.” “그거 루머 아니었어요?” 동그랗게 변한 레나의 눈을 보며 치글러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들 그렇게 믿고 있죠, 저 또한요. 치글러는 말을 삼켰다. “명분이겠죠.” “괜한 말을 해서 죄송해요.” 레나는 서툰 위로의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옮겼다. 손바닥에 힘을 주어 제시의 허리를 때리니 제시는 궁시렁거리며 허리를 폈다. 말이 없는가 싶더니 치글러를 향해 담배를 흔들었다. 치글러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시는 치글러에게 악수를 청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치글러는 굳이 기다리지 않았다. 돌아다니면서 과자나 칵테일을 주워 먹었고 이따금 누군가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제시가 건넨 쪽지를 치글러는 바로 열어볼 수 없었다. 오버워치가 해체되면서 사람들은 눈치를 보지 않았고 때 묻은 소문들은 수치심도 모른 채 나돌았다. 한때 모두의 존경을 받던 사령관들은 명분이라는 비석 아래 묻혔고 평화를 외치던 시체는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치글러는 그들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자정이 넘으면서 펍은 점점 조용해졌고 치글러는 모른 척 쪽지를 열었다. ‘유령은 독설가.’

치글러는 종이를 반으로 접어 찢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멀리 날렸다. 멀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자가 있음을 알았지만 치글러는 굳이 그 방향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림자는 계속해서 부서졌지만 죽는 방법은 몰랐다. 묘비 아래에서도 쉽게 눈을 감지 못하는 남자에게 치글러는 큰 연민을 두지 않았다. 치글러가 달 아래 눈을 감았을 때 그림자는 치글러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치글러는 죽은 사람을 살릴 줄은 알았지만 산 사람을 죽일 줄은 몰랐고 모두를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림자는 굳이 치글러에게 둘을 바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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