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 우울한 그를 달래주세요 l
아나X맥크리
라면햄
맥크리는 일정을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아나와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한 잔하고, 분위기 좋은 강가에서 드라이브를 한 후, 돌아가려는 그녀를 잡고 호텔에 예약한 자리가 있다고 말하기. 좋아, 맥크리는 숨을 들이쉰 후 아나의 방 문을 두드렸다.
“아나.”
잠시 후 나온 아나는 그를 보며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모자에 눌린 머리와 먼지투성이의 판초(아나 앞에서는 먼지를 털었지만)를 입은 그가 아닌 잔뜩 힘줘서 넘긴 머리에 수트 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보기 좋은 걸?”
“신경 좀 썼습니다.”
맥크리는 아나의 미소에 심장이 두근거려서 가슴을 피고 으스댔다.
“오늘 약속은 저한테 정말 중요하니까요.”
아나는 이마 위로 삐쭉 올라간 그의 머리가닥을 손가락으로 빼서 다시 넘겨주었다. 그 손짓에 맥크리는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빨리 준비했네. 에스코트하러 온 거면 미안해서 어떡하지? 난 아직 준비가 하나도 안되었는데.”
“아, 아뇨.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나오셔도 됩니다.”
“그래도 약속 시간은 8시인데, 조금 이르지 않니?”
“네?”
맥크리는 어리둥절했다.
“편지에 6시라고 적었는데......”
아나는 책상에서 편지를 가져와 보여주었다. 맥크리가 몇 날 몇 일을 고심하던 끝에 아나 방의 우편함에 넣은 상아색 편지와 다른 붉은색 편지였다.
“‘오버워치 요원 모두가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음 해를 맞이하는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연말 파티를 빛나는 한 사람이 되어주세요. 앙겔라가.’”
편지를 읽은 맥크리의 손이 떨렸다. 분명 휴게실에서 앙겔라에게 직접 연말파티 초대장을 받기는 했었다. 하지만 맥크리에게는 훨씬 당일에 중요한 약속이 있었으니, 바로 아나와의 만남이었다. 아나의 우편함에 넣은 맥크리의 편지는 아나에게 12월 31일 날 자신과 만나달라는 내용으로, 거절은 거절한다는 용기 있는 말까지 덧붙여 있었다.
“오, 맥크리. 혹시 나에게 편지 보냈었니? 나는 우편함은 확인 안 하는 사람인데.”
편지 올 곳은 없으니까, 아나의 말에 맥크리는 머리를 된통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
앙겔라는 아담한 파티장을 꽉 채운 인원에 만족했다. 윈스턴과 레나 등과 파티 준비를 같이 한 보람이 있었다. 앙겔라는 입구에 서서 파티장에 입장하는 요원들을 일일이 친근하게 맞이하였다. 맥크리가 등장했을 때 앙겔라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오지 않는다는 놈이 왔네, 라고 말을 걸었지만 그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저 멀리 아나는 짙은 청밤색에 끝에 하얀 스파클 무늬가 있는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자태로 토르비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땋아서 머리 가로 둥글게 정돈되어 있었다. 붉지 않지만 맥크리에게는 한없이 매혹적인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겐지! 와줬군요.”
“치글러 박사님의 초대인데 당연합니다.”
반듯한 수트 차림의 겐지는 그를 반기는 앙겔라와 가벼운 포옹을 나누고 맥크리를 돌아보았다.
“전에 훈련장에서 네 총알과 내 튕겨내기 중 뭐가 더 빠른지 대전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겠지. 파티 끝나고 시간 되면 결판을 내보지.”
집착이 느껴지는 겐지의 말을 맥크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샌드위치 조각을 한 입에 먹어 치울 뿐이었다.
“이 못난 맥크리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지. 시간이 넘쳐난 나머지 내 방에 있는 사파이어 반지가 석유가 될 수 있을 정도야.”
“농담하는 건가?”
겐지가 갸우뚱하자 앙겔라는 맥크리의 등을 내리치려다 참았다. 그의 아나를 향한 애탄 시선에 앙겔라는 한숨을 쉬었다.
“뭐 마실래?”
“보드카.”
“와인으로 마셔.”
“왜 묻는 거야.”
그때 송하나가 레드 와인으로 찰랑이는 잔을 두 개 들고 와 하나를 맥크리에게 건넸다.
“이게 필요한 거였지요?”
“감-사-히 마시지.”
“상태 왜 이래, 아저씨.”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겐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엄청 울적해 보이는데? 주식이라도 날린 얼굴이야. 아니면 저번 임무 때 사격 솜씨가 많이 아팠던 걸 회상 중인 거야? 괜찮아, 내가 부스터로 잡아줬잖아.”
맥크리는 순간 울컥할 뻔한 마음을 되잡았다. 가뜩이나 슬픈데 옆에 사람이 모여서 들뜬 말투로 이야기를 하니 더욱 기분이 내려앉는 듯 했다. 그는 심술을 부렸다.
“그 때는 감기 기운 때문이었어. 그리고 네가 말한 모든 이유는 다 틀렸어. 그러니까 지레짐작하지 말고 저리 가라고. 혼자 있고 싶으니까.”
하나는 비웃었다.
“뭐래,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이 왜 파티에 왔담?”
그러게, 맥크리는 할 말이 없어 술을 들이켰다. 앙겔라는 눈빛으로 오늘은 맥크리를 약 올리지 말라고 부탁하는 신호를 보냈다. 하나는 그 눈빛을 받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맥크리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조금 높긴 했지만 성공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나랑 예전에 주량 대결하자고 했지? 오늘 붙어보자! 지금 넘쳐나는 게 술이란 말이야.”
기분 좀 띄워주면 되는 거지요? 하나는 앙겔라에게 윙크를 보냈다.
“아니, 그냥 맥크리에게 시비만 걸지 않으면 되는데......”
앙겔라가 말릴 새도 없이 하나는 겐지에게 심판을 부탁했다. 레나가 먼저 입에 치즈 케이크를 물고 다가왔고 이후 오버워치 요원들은 이 주량 대결의 승자가 누구인지 내기를 했다. 토르비욘의 작은 휴대용 보드는 두 편으로 갈라져 숫자가 적혔다. 맥크리는 갑작스러운 알코올 잔치에 휘말렸지만 차라리 다행이라는 심정이었다.
‘잔뜩 마시고 취하련다.’
그렇게 겐지가 첫 와인잔의 코르크를 맨 손으로 경쾌하게 따는 순간이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이런 술 내기는 불공평하지 않니?”
조용하던 아나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진지한 그녀의 말에 멀찍이 벽에 기대있던 앙겔라는 옳다구나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아나는 활짝 웃었다.
“하나 대신 내가 할게.”
앙겔라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의 뺨에 손을 대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연말파티를 주최하는 동안 이런 엉뚱한 술 잔치가 되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옛 동료들이 모여 이야기하지 못한 사정에 대해 털어놓고 정다운 분위기가 되기를 원한 그녀의 바램과는 다른 눈앞의 광경에 그녀는 체념했다. 겐지의 빠른 손놀림으로 두 잔은 와인으로 가득 차 올랐다. 그를 중심으로 양 옆에는 맥크리와 아나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모두 여유로운 표정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잔을 들이켰다. 주변을 가득 채운 오버워치 요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주량 대결을 날 빼고 겨루다니, 섭섭하구려!”
상심한 앙겔라 옆에 라인하르트가 자리를 지켜주었지만 그녀의 마음과는 꽤나 멀어 보였다.
맥크리가 먼저 머리 위에 잔을 털었고 아나는 한 박자씩 느렸지만 결코 밀리지 않았다. 레나는 흥을 참을 수 없는 듯 공중제비를 한번 가볍게 돌았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다수의 사람이 맥크리가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맥크리는 술을 마실 때 열리는 위가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주량을 과시하곤 했었다. 컨디션이 나쁠 때도 적을 일망탕진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훈련장에 보드카를 가지고 들락거려 윈스턴에게 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반면 아나는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헬기 착륙장에서 와인을 홀짝이는 모습이 몇 번 보이긴 했지만 그 외에는 술을 입에 잘 대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전장에서도 티타임을 대비해 차와 찻잔을 휴대하는 차 애호가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싸움은 예상과는 다르게 점점 길어져 파티장의 열기를 달아오르게 했다. 겐지가 와인의 코르크를 맨손으로 개봉하고 두 잔에 따르는 시간은 단 2초뿐임에도 말이다. 모두가 마실 와인이 거덜이 났을 쯤에는 루시우도 디제잉을 멈추고 옆에 와서 구경을 하는 바람에 같은 노래가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괜찮나, 맥크리?”
맥크리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들린 겐지의 목소리에 정신을 붙잡았다.
“무슨 일 있어?”
“너 지금 탁자에 엎드려 있잖아.”
“자네가 힘들다면 이 라인하르트가 출전하겠소. 자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라인하르트는 당장이라도 그 큰 손으로 맥크리를 종잇장처럼 밀어내고 자리에 앉을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송하나는 그런 라인하르트를 막아서고 맥크리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게임은 아직 안 끝났어요! 아저씨, 얼른 일어나요. 나 아저씨가 이기는 거에 얼마 걸었는지 알아요?”
맥크리는 작게 신음하며 얼굴을 쓸어 내렸다.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치미는 건 그에게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나는 링 위에서 쓰러진 선수를 관리하는 코치처럼 토마토가 터진 카나페를 그의 입에 밀어 넣었다. 맥크리는 몇 번 우물거리다가 웩 소리를 냈다. 얼토당토않은 짠 맛이 혀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음식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입을 막고 주변을 노려보는 맥크리에게 윈스턴은 손사래를 쳤다.
“모두 레나 때문이에요. 카나페를 한입 먹더니 아무 맛도 안 난다면서 소금을 뿌리는 바람에.”
“누가 소금통의 입구를 덜 닫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지.”
윈스턴과 레나가 서로 왕왕거리든 말든 맥크리는 고통스러워하며 물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물을 마시면 기권으로 알게.”
아나는 물컵을 잡고 그에게 밀어주었다. 물이 찰랑이며 조명에 반짝였다. 술을 마신 선수는 따로 있기라도 한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맥크리는 입 안을 남몰래 이빨로 깨물었다.
‘만약 지면 이건 다 저 망할 놈의 카나페 때문이야.’
“다음!”
맥크리가 외쳤다.
-
맥크리는 갑작스러운 오한에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떴다. 잠시 의식이 암전되었던 느낌이었다. 오버워치 훈련장 끝 편의 얼음과 돌이 엉킨 장소에 그는 두꺼운 회색 담요를 덮고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 너머에 밤을 담은 바다 물결이 얼음과 함께 조용히 물결쳤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지, 생각할 쯤에 그는 자신이 누군가와 서로 기대고 있는 체온을 느꼈다. 맥크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아나는 조금 지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은 차분했다. 맥크리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나의 오른편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 쪽을 가린 머리카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아나가 부드럽게 말하자 맥크리는 답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을. 이렇게나 아름다우신데요.”
더욱 달콤한 말을 속삭이려는 그의 입을 아나가 불쑥 내민 편지가 막았다. 익숙한 상아색 편지였다.
“우편함 봤다. 네가 깨면 승부를 봐야 한다며 널 끌고 온 겐지가 여기서 칼을 갈고 있는 걸 내쫓았지.”
“……하긴 당신이 파티장에서 훈련장까지 절 업고 왔다는 건 상상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칼’을 갈고 있더라, 아나의 말에 맥크리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맥크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아나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느라 말을 멈춘 줄 알았다.
“네가 하도 씩씩거리면서 술을 마시길래, 뭔 일인가 했더니……”
“……”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애인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었네.”
‘애인’이라는 단어에 맥크리의 섭섭함의 잔해가 발 아래의 얼음이 파도에 녹듯 사라졌다.
“당신과 단 둘이 12시를 맞이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맥크리는 아나와 함께 하면 언제나 의식이 현실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차근차근 들어야지 집중이 되었고, 간단한 수신호도 이해하지 못해서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한다. 심장 박동이 너무나 빨라서 행동이 꼬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나와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도 늦게 인지했다. 그 따뜻함을 느끼기도 전에 아나는 입술을 떼고 맥크리의 눈을 응시했다. 취한 듯한 그의 눈에 아나는 작게 웃었다. 그녀는 멍하니 벌리고 있는 그의 입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닫아주었다.
“미안, 제시.”
맥크리는 망설이다가 혀로 그녀의 손 끝을 살짝 핥았다.
“……그럼 이 불쌍한 제시가 조금 더 욕심을 내도 될까요?”
“불쌍하다니.”
“당신과의 새해 첫날을 시작하는 건 물 건너 가버렸잖아요.”
아나는 맥크리의 이마를 툭 밀쳐냈다.
“누가 12시 지났대? 아직 11시 57분이란다.”
이럴수가. 맥이 풀려버린 맥크리였다. 아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어깨에 다시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어두운 밤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욕심은 부릴 거예요.’
맥크리는 생각했다.
‘동이 틀 때까지, 함께 있어달라고.’